산업

[데스크칼럼]0.23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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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윤경 산업부장
2024-04-19 09:02:17
서윤경 산업부장
 

[이코노믹데일리] 산업부장 신고식은 ‘퀴즈’로 시작해 보려고 한다. 주먹 크기의 돌덩어리와 무게 0.23g의 반도체 칩 중 수출에 도움을 주는 건 무엇일까. 사실 이 질문은 2016년 정부가 배포한 수출 통계 보도자료를 보고 스스로에게 던진 것이다. 정답은 ‘없었다’.
 
당시 정부는 무역수지가 수 개월 째 적자를 기록하자 이전에 보지 못한 자료를 배포했다. 정확도가 떨어져 정부도 사용하지 않는, 수출 중량으로 잡은 수출 통계 자료였다. 통계의 착시 효과를 노린, 의도가 다분한 보도자료였다. 그래서 기사는 "반도체보다 무거운 돌덩어리 파는 게 낫느냐"며 정부를 지적하는 문장으로 끝냈다. 물론 정부가 돌덩어리, 반도체를 콕 집어 얘기한 건 아니지만.
 
그리고 돌덩어리와 비교되던 그때 그 반도체는 이제 착시 효과의 함정에 빠질 필요가 없게 됐다.
 
한국경제인연합회가 분석한 한국 무역수지 현황을 보면 지난해 3월부터 올 3월까지 누적된 무역수지 흑자는 170억 달러인데 반도체 수출만 떼어 내면 같은 기간 무역수지는 1006억600만 달러로 적자가 된다. 반도체가 한국의 무역수지를 끌고 간 셈이다.

한국만의 상황이 아니다. 이미 전 세계 주요국들이 반도체 패권 전쟁을 치를 만큼 그 몸값은 높아졌다.
 
전쟁에 참전한 나라들이 공통적으로 세운 전략은 '돈'을 앞세운 속도전이다. 미국은 ‘압도적 반도체 강국’을 기치로 내걸며 주요 반도체 기업의 지원 방안을 마련했다. 일본, 유럽연합(EU), 중국 등도 반도체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지원책을 내세웠다. 지원책을 마련하니 빠르게 실행에 옮겼다.
 
미국 정부는 자국 기업인 인텔은 물론 삼성전자, 대만 TSMC 등을 유치하기 위해 보조금을 쏟아붓고 있다. 인도와 일본도 투자액 대비 보조금 지원 정책을 내놨으며 EU는 관련 정책을 개선하기 위한 논의에 돌입했다.
 
그런 점에서 1960년대부터 산업화를 거치며 ‘빨리 빨리’ 유전자를 이식한 한국의 반도체 기업은 유리하다.

이미 손익 계산을 따지며 발 빠르게 대처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미국 첨단 파운드리 생산에 대규모 투자를 약속한 뒤 9조원에 달하는 미국 정부의 보조금을 받게 됐다. SK하이닉스도 인디애나주에 38억7000만 달러를 투자해 반도체 패키징 생산기지를 건설한다.
 
여기서 드는 의문점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뭘 하고 있느냐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각종 지원과 보조금 정책을 발표하고 있지만, 기억에 남는 건 지원 액수 뿐 명확한 그림은 그려지지 않는다.
 
그나마 있는 지원도 올해 말 시효가 만료돼 법안 폐기를 앞두고 있다. ‘K-칩스법’이라 불리는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 얘기다. 설비투자를 하면 최대 15%(중소기업은 25%)를 세액공제 해주는 제도다.
 
이러다 보니 관련 업계와 학계, 단체가 정부와 국회에 전략적인 지원의 필요성을 무시무시한 단어를 앞세워 강조하고 있다. 보조금이 아닌 군자금이다. 과거 투자하면 ‘얼마를 주겠다’ 식의 보조금 수준이 아니라 반도체 보조금은 '밖에 나가서 싸워서 이기고 오라'는 군자금이 됐다는 얘기다.

다행인 건 22대 총선을 치르는 과정에서 여야가 가리지 않고 반도체 육성에 한 목소리를 냈다는 점이다. 여기에 보조금을 두고 '재벌 혜택'이라며 부정적 시선을 보내던 대중의 시선도 달라지고 있다. 미국 상무부는 삼성전자에 보조금 지급을 발표하면서 발생하는 경제적 효과를 이렇게 설명했다. 삼성전자가 미 텍사스에 반도체 생태계를 발전시키면 향후 5년 내에 1만7000개 이상의 건설 일자리와 4500개 이상의 고임금 제조업 일자리를 창출하는 동시에 지역 경제를 살릴 거라는 효과. 
미국 정부의 발표를 보고 우리 국민도 삼성의 반도체 생태계가 미국에 생기는 걸 기대하지는 않을 듯 싶다.

그런 의미에서 돌 덩어리와 비교한 0.23g 반도체에 사과하며, 프랑스 계몽사상가 볼테르의 한 마디를 한국 정부에 건네고 싶다.
 ‘미래는 현재에서 태어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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