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오늘날 한국 정치에는 이 핵심 과정이 완전히 실종되었다. 여야 모두 스스로가 국민의 대표라는 사실을 잊은 채 ‘논의 없는 결정’과 ‘토론 없는 강행’이라는 위험한 관행을 일상화하고 있다. 정치는 절차를 통해 신뢰를 쌓는 법인데 지금의 정치권은 절차를 파괴함으로써 스스로 신뢰를 무너뜨리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국회 안에서조차 정상적 의사결정 구조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법안은 토론보다 속도가 우선시되고 논리보다 힘이 앞서며 국민의 의견보다 정당의 계산이 기준이 되고 있다. 이렇게 졸속으로 만들어진 정책과 법은 정치 상황이 바뀌면 언제든지 다시 뒤집힌다.
오늘은 옳다고 밀어붙였던 법을 내일은 문제라며 뒤집는 일이 반복된다. 이처럼 정치가 스스로 만든 결과물을 스스로 단죄하는 자기부정의 정치, 이것이 지금 한국 정치의 민낯이다.
정당 또한 책임이 크다. 정당은 토론의 장이어야 한다. 다양한 의견이 충돌하고 그 충돌 속에서 정교한 정책이 만들어져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정당은 이미 오래전부터 의견 수렴 기능을 상실했다.
당내 회의는 이미 결론이 정해진 채 열리고 지도부는 ‘정치적 충성도’만을 기준으로 의원들의 입장을 강제한다. 이 과정에서 국회의원 개인의 전문성은 무시되고 국민의 대표로서 발언할 기회는 박탈된다. 그 결과 여야 모두 ‘지도부 지침에 고개 숙이는 정치인들’만 양산하며 정치는 더욱 무기력해지고 있다.
문제는 이런 구조가 단순한 비효율을 넘어 국가 전체의 정책 안정성을 위협한다는 데 있다. 정당 간 힘겨루기로 만들어진 법안은 정권이 바뀌거나 세력이 이동하면 다시 폐지된다. 행정부는 어느 방향으로 움직여야 할지 예측할 수 없고 기업은 미래 계획을 세울 수 없으며 국민은 매번 새로운 규제와 정책 변화에 휘둘린다. 이렇게 하루 건너 뒤바뀌는 국가 정책은 국가의 경쟁력 자체를 약화시키는 치명적인 독이다.
정치가 정상화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토론의 복원이 필요하다. 토론이 없으면 정책은 정치적 흥정이 되고 합의가 없으면 법은 통치 수단으로 전락한다. 지금처럼 여야가 먼저 결론을 정해 놓고 국회 전체에 이를 강요하는 구조에서는 어떤 문제도 해결될 수 없다.
정치가 제 역할을 하려면 국회의 문을 열고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을 듣고 공론장을 확대해야 한다. 속도가 늦어질지 모르지만 그 속도가 오히려 민주주의의 건강한 신호다.
또한 정당 내부의 민주성 강화 없이 한국 정치의 정상화는 불가능하다. 당내 절차를 투명하게 만들고 지도부의 일방적 결정 구조를 개혁하며 의원 개개인의 전문성과 책임성을 강화해야 한다. 정당이 다시 ‘토론의 공간’이 될 때 국회 또한 제 기능을 되찾을 수 있다.
지금 한국 정치의 문제는 어느 한 진영이나 특정 세력의 문제가 아니다. 정치 전체가 작동 방식을 잘못 학습했고 그 결과 국가 운영의 기본 질서가 흔들리고 있다. 문제는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국민은 정쟁의 피해자가 되고 있으며 정책은 표류하고 있고 국가는 멈춰 서 있다는 사실이다.
정치는 결국 결과물을 만드는 제도적 기술이다. 그러나 그 결과물이 정당성을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논의와 협상, 타협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 과정을 생략한 정치가 가져오는 폐해는 이미 충분히 경험했다. 더 이상 반복해서는 안 된다.
한국 정치는 지금 변화의 마지막 문턱에 와 있다.
과정을 회복하지 않는 정치, 논의를 잃어버린 정치, 타협을 거부하는 정치는 결국 스스로를 파괴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정치의 가장 기초적인 기능을 다시 세우는 일이다.
그 단순한 진실을 외면한다면 한국 정치는 앞으로도 ‘위기’라는 단어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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