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기업은 잘하는데…늑장 지원에 표류하는 자율운항船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성상영 기자, 임효진 수습기자
2024-02-08 06:00:00

사람 없이 스스로 항해하는 자율운항船

내년 3단계 개발…"2030년 완전 무인화"

국내엔 규제 많고 해역 없어 줄줄이 美로

뒤늦게 대책 마련…"적극적인 지원 필요"

지난해 하반기 미국에서 판매를 시작한 HD현대 아비커스의 자율운항 레저보트사진HD현대
HD한국조선해양이 지난해 8월 세계 최초로 선사에 인도한 '인공지능(AI) 기관사' 탑재 선박[사진=HD현대]
[이코노믹데일리] 자율운항 선박이 표류하고 있다. 선장과 항해사 대신 스스로 운항 경로를 결정하고 다른 선박을 회피하며 목적지까지 항해하는 배를 만드는 게 목표지만 상용화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기술을 개발하더라도 법적·제도적 토대가 뒷받침되지 않아서다. 정부와 국회는 뒤늦게 관련 법령을 정비하고 지원책을 내놨는데 유럽이나 중국·일본에 시작부터 밀릴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7일 조선 업계 등에 따르면 자율운항선 상용화는 오는 2025년부터 2030년까지 단계적으로 이뤄질 예정이다. HD현대와 한화오션·삼성중공업 등 주요 조선사는 우선 2025년 3단계 수준 기술을 선보이고 궁극적으로 무인 운항 선박까지 개발한다는 청사진을 내놨다. 업계는 메탄올과 암모니아 등을 연료로 쓰는 친환경 엔진까지 탑재해 한국 조선업이 다음 '슈퍼 사이클(초호황)'을 주도할 것이란 포부를 밝힌 상태다.

◆조선·해운 판도 바꿀 자율운항, 업계 경쟁 '치열'

자율운항선은 크게 4단계로 구분된다. 먼저 1단계에서는 선체 제어와 항로 설정 등이 일부 자동화돼 인간 선장·선원의 의사 결정을 돕고, 2단계에선 선상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 배를 통제하지만 선원이 탑승한다. 3단계로 가면 선원이 탑승하지 않고 원격으로 제어가 이뤄지고 마지막 4단계에서는 사람의 개입 없이 시스템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 운항한다.

자동차나 철도, 항공 등 다른 교통수단은 자동화·무인화가 일부 진행됐다. 항공기는 오래 전부터 기상 상황이나 통행량이 일반적인 상황에서 이·착륙을 뺀 대부분 과정이 자동항법장치에 의해 수행된다. 자동차는 현재 출시된 차량에 차로 변경과 자동 조향 같은 부분 자율주행 기술(3단계)이 상용화를 앞뒀다. 철도는 일찌감치 신분당선과 부산김해경전철 등 국내 도시철도 노선에서 무인 열차가 상업 운영 중이다.

이와 달리 선박은 실제 해상 운송에 접목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릴 뿐 아니라 기술 개발 현황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자율운항선이 일반에 선을 보인 건 지난 2022년 7월 HD현대 계열 자율운항 전문회사 아비커스가 국내 언론을 대상으로 레저보트 운항을 시연했을 때였다.
 
HD현대 아비커스의 자율운항 솔루션을 탑재해 2025년 부산에서 운행 예정인 해상택시사진HD현대
HD현대 아비커스의 자율운항 솔루션을 탑재해 2025년 부산에서 운행 예정인 해상택시[사진=HD현대]
국내 대형 조선 3사의 기술은 3단계 수준까지 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비커스가 당시 공개한 자율운항 레저보트에는 2단계 시스템이 적용됐다. 앞서 같은 해 6월 자율운항 솔루션 '하이나스 2.0'을 탑재한 대형 선박으로 세계 최초로 대양 횡단에 성공하기도 했다. 한화오션은 2030년까지 4단계(완전 자율운항) 기술을 개발한다는 목표다. 삼성중공업은 경남 거제에서 대만까지 약 1500㎞에 걸쳐 1만5000TEU(1TEU=20피트 컨테이너 1개)급 자율운항 컨테이너 운반선을 시범 운항했다.

무인 선박의 등장은 조선업과 해운업 판도를 바꿀 것으로 예상된다. 조선업은 한국과 중국 간 기술 격차가 거의 없어졌고 건조 능력은 중국이 훨씬 높은데, 친환경 엔진과 더불어 자율운항 기술이 고도화되면 다시금 한국이 주도권을 쥘 수 있다. 국내 업체가 '기술 로열티'를 챙기며 높은 부가가치를 내는 것이다. 해운업에 따라붙는 이른바 휴먼 에러(인적 과실)에 따른 해상 사고를 줄이고 선원의 업무 효율성·편의성 증대가 기대된다. 무엇보다 군사 분야에서 무인 전투체계가 육군·공군만이 아닌 해상에 도입돼 해군 전력에 거대한 변화를 불러올 수 있다.

◆정부·국회는 뒤늦게 법령 마련…"규제 해소" 목소리

기업의 자율운항 기술은 해외 조선사보다 앞섰다는 평가가 많지만 정부와 국회가 이들을 뒷받침하지 못하는 형국이다. 선박직원법과 선박안전법, 선원법 등에 따르면 승무 정원 이상 선원이 배에 오르지 않거나 면허가 없는 해기사를 승선시키면 처벌을 받는다. 만약 해상 사고라도 나면 보험 혜택을 받지 못해 선사가 손해배상 책임을 전부 져야 한다.

국회는 지난해 12월에야 자율운항선박법을 본회의에서 통과시켰다. 실증을 위한 법적 근거가 만들어졌지만 세부 내용을 명시한 하위 법령은 막 논의가 시작된 단계다. 업계 관계자는 "자율운항선 시운전 가능 범위를 확장하거나 단계별 시운전 신고 절차를 적합하게 적용하는 등 선박의 특수성을 고려해 법령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하반기 미국에서 판매를 시작한 HD현대 아비커스의 자율운항 레저보트사진HD현대
지난해 하반기 미국에서 판매를 시작한 HD현대 아비커스의 자율운항 레저보트[사진=HD현대]
자율운항선과 관련한 국제적 논의는 활발하다. 국제해사기구(IMO)는 2022년 4월 공동작업반을 구성하고 올해 '자율운항 선박에 대한 목표지향형 가이드라인'을 만들 계획이다. 이어 2028년부터는 이를 더 구체화한 강제 협약인 '자율운항선박협약(MASS Code)'을 발효한다는 구상을 갖고 있다.

적어도 국내 법과 제도가 글로벌 시장 추세와 보조를 맞춰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임정빈 한국해양대 교수는 "한 단계씩 안정성을 검토하면서 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도 맞다"면서도 "핵심 기술을 개발하는 동시에 국제적 트렌드를 좇아야 하고 국내 규정도 만들어 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규제에 발목이 잡힌 기업들은 해외로 발길을 옮기고 있다. 아비커스는 지난해 9월 미국에서 자율운항 레저보트 판매를 시작하며 사업화에 나섰다. 이 회사는 올해 인력을 확충해 미국 사업을 본격적으로 진행한다는 방침이다. 한화오션은 미국선급협회(ABS)와 실증을 추진 중이다.

기업이 미국으로 향한 건 레저용 소형 요트 시장이 발달했다는 이유도 있지만 국내에서는 자율운항 장비를 탑재한 선박을 충분히 시험해 볼 수 있는 해역이 없는 탓이 크다. 정부는 2019년 11월 경남 남해안 일부를 무인 선박 규제자유특구로 지정했는데, 소형 선박 위주로만 실증이 진행된 채 지난해 말 특구에서 해제됐다. 관련 법령이 제대로 뒷받침되지 않아서다. 그나마 자율운항 시스템을 갖춘 해상택시가 2025년부터 부산에서 운영할 계획이 나온 상태다.

경제계도 규제를 해소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는 지난달 29일 "유인 선박에 적용한 승무원 필수 탑승 규제를 무인 선박에 적용하면 관련 기술 발전을 저해할 수 있다"며 자율운항선에 대한 규제를 유예하고 미흡한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고 국무조정실에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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